본문 바로가기

집단지성

■올해는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 100주년■(다큐 2편 소개)

■올해는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 100주년■
(다큐 2편 소개) 
 
●만주의 항일 독립군이 정규군 편제와 무기를 갖춰, 일본 정규군(당시 세계 3위 군사력에 잔인성 세계 1위)을 대량 살상한
독립군의 첫 승전보● 
 
전 민족에게 독립 의지를 불태우게했고, 많은 청년들이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에 합류하게됨.  
 
●EBS에서 광복절날 방송한 다큐 2편을 소개합니다● 
 
[1부 : 첫 승리의 기억 봉오동 대첩]
(EBS 2020년 8월 15일)
https://bit.ly/2PUsfQX  (45분) 
 
[2부 : 독립군의 위대한 유산, 청산리 대첩]
(EBS 2020년 8월 15일) 
 
https://bit.ly/2E73jDg (45분)

 

특집 다시보기(무료) - 1부 - 승리의 기억, 봉오동 전투

망향의 독립군‘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을 추적하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독립전쟁 1회전’인 봉오동 전투. 그 전투를 생생히 만나본다.

www.ebs.co.kr:443

 

특집 다시보기(무료) - 2부 - 독립군의 위대한 유산, 청산리 전투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 전투의 막이 올랐다. 독립을 향한 의지로 쟁취해낸 승리의 기억. 그 정신은 끝까지 살아 20년 후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된다.

www.ebs.co.kr:443

성함 한분, 얼굴 한분 후세들에게까지 기억시켜야할 영웅들 
 
이들의 투쟁 덕분에 한국은 투지를 인정 받아 2차대전 종전후 국제회담에서 바로 독립을 인정받게 됨. 
 
이름도 없이 스러진 독립군들께, 후손들이 이 두 영상으로 눈물의 감사를 표합니다. 
 
특히 이 승리는 간도 한인들의 눈물 겨운 후원으로 이루어진 '모두의 승리'였습니다
(임시정부의 큰 그림도 한몫 해 3위 일체) 
 
다큐 내용에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스토리를 전합니다.
----------------- 
 
[봉오동 대첩 스토리] 
 
정확히 100년전인 1920년 6월 4일~6일 
 
홍범도(대한독립군 총사령관)와 최진동(대한군무도독부장), 안무(국민회군 사령관)장군 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것이 봉오동전투다 
 
봉오동은 두만강 북쪽 만주의 간도 지역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독립전쟁 1회전'인 봉오동 전투.  
 
10 km 계곡 요새에서 이뤄진 그 전투를 생생히 만나본다 
 
신출귀몰 구한말 의병대장 출신 <홍범도 장군>이 1등 공신
(정부가 님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올해중 봉환 추진중) 
 
또한 이 일대 부산 6배 크기 땅에서 농장과 공장으로 부를 축적한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장군 3형제>의 독립군 양성이 큰 힘이 됐다. 정규군 위상. 
 
1700명 정도의 독립군이 일본군 정예 19사단을 유인해 150명 사살, 소총 160정, 기관총 3, 수류탄 등 노획 
 
"싸우면 이길수 있다"는 증거가 돼 많은 청년들이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에 합류. 민족을 각성시켰다. 
 
시베리아에서 철군 중이던 체코 군단으로부터 천신만고 끝 신무기를 구입했고, 하늘을 찌르는 승리 의지가 힘.  
 
3.1운동의 결실.
바로 1년만인 1920년에 만주 항일 무장투쟁의 도화선이 불 붙음
------------- 
 
[청산리 대첩 스토리] 
 
같은 해(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지린성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 청산리전투다(두만강 상류 지역)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연합해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백두산 동남쪽  25㎞의 심산계곡) 전투의 막이 올랐다 
 
일본군의 포위전을 역이용해 매복후 선제 공격. 어랑촌이 격전지.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했고, 독립군 전사자는 100여 명

세 방면에서 포위해온 일본군 2만여명을 3천여독립군이 격파하는 기적을 씀 
 
폭설 속 짚신 신고 굶주리며 이룬 승리.
-------------- 
 
[후원 그룹은?] 
 
10년간 3500명의 독립군 장교를 키워낸 <신흥무관학교>의 투자가 밑거름 
 
전 재산 팔아 1909년 만주에 망명, 무관학교를 운영한 <우당 이회영 선생 6형제>의 투혼이 만든 금자탑 
 
신도 수십만명의 대종교(민족종교)도 1913년부터 만주로 옮겨 무장투쟁을 적극 지원. 
 
북로군정서 서일(徐一)총재(장군)가 대종교 대표 
 
1919년 8월에 서일·김좌진·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최해(崔海)·정훈(鄭勳)·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김훈(金勳)·백종렬(白鍾烈)·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등 
 
또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한민회(韓民會)·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이 연합한 부대였으며,  
 
그 병력은 약 1,400명이나 되었다 
 
두 전투 주역들이 광복때까지 항일 투쟁의 주역 
 
그 정신은 끝까지 살아 20년 후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된다
--------------- 
 
[대첩의 주인공은 간도로 피난한 한인들] 
 
동포 누구 할 것 없이 주먹밥 고구마 감자 등 식량을 제공하고 후원금을 냈다. 
 
당시 소총 한 정은 만주 품삮 1년치로 아주 비쌌는데, 동포 여성들은 비녀 등 장신구까지 내놓았다. 
 
(이로 인해 체코 중고시장에는 지금도 조선 여성의 장신구가 나온다고 함) 
 
게다가 교민들은 시베리아로부터의 신무기 이송을 목숨 걸고 도왔다.  
 
200명의 교민이 서울~부산 정도 거리의 산길로 여러 날에 걸쳐 몰래 이송해왔다. 
 
일본군 동향도 제보하고 일본군에겐 거짓 정보를 주기도 했다. 
 
조선 민중의 승리였다.  
 
한국의 민초들은 번영 국가를 누릴 자격이 넘친다 
 
역사학자들은 미 발굴 독립운동사 발굴에 더 힘을 쏟아야 
 
by 김일 소장